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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시선] 디아스포라의 묘

개인적으로 연이 없는 이들의 타계 소식이 마음을 휘젓고 지나갈 때가 있다. 유명 연예인이나 정치인의 죽음이 그런 슬픔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우리의 감성과 지성을 살찌운 책의 저자나 마음속으로 흠모하던 정신적 스승의 죽음은 생각보다 큰 상실감을 수반한다.   필자는 ‘디아스포라 지식인’으로 불린 재일조선인 2세 서경식 교수의 타계 소식을 들었을 때 그랬다. 두 달 전인 12월 18일, 자택에서 향년 72세로 타계한 그는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역사의 증인 재일 조선인’ 등 여러 권의 저서를 통해 자신과 재일조선인, 더 나아가 소외된 이들의 존재에 관해 물었다.     서 교수의 일생을 들여다보면 왜 그가 생전 그런 고민을 했는지 조금은 가늠할 수 있다. 1951년 피비린내 나는 6·25 한국전쟁 중 교토에서 태어난 그의 삶은 일본 내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의 서사로 점철된 것과 동시에 모국의 분단 이데올로기 희생양이기도 했다.   그의 청년 시절, 서울대에서 공부하던 친형 둘이 이른바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휘말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된 일이 있었다. 대한민국 여권을 소지한 일본 거주 재일조선인에게 분단된 한반도는 상냥하지 않았다. 그는 20년의 세월 동안 형들을 위한 구명 활동과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장례를 치러야 하는 비애를 겪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유독 ‘죽음’에 집착한다. “어디서 어떻게 죽을까. 언제나 그게 마음에 걸린다” 라는 ‘디아스포라 기행’의 한 문구가 그런 심리를 대변한다. 그는 생전 여행하는 나라의 예술가와 철학자들이 묻힌 묘지를 방문하곤 했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하나하나의 묘가 그에게는 다 같지 않았다. 대부분의 묘는 전통적 양식, 종교적 예식, 문화적 유산, 가문의 역사를 반영한다. 하지만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묘, 묘비가 쓰여 있지 않은 묘를 그는 ‘디아스포라의 묘’라고 명명했다. 그렇기에 그가 평소 자신과 같은 디아스포라적 배경을 가진 지식인들에 끌린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는 프리모 레비와 에드워드 사이드를 자주 인용했다. 레비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던 유대계 이탈리아인 작가이고, 에드워드 사이드는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주장하던 팔레스타인계 미국 석학이다. 레비와 사이드는 각각 유대인, 팔레스타인으로서 자신들이 겪은 디아스포라적 경험을 자기연민의 도구나 타자에 대한 무기로 이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은 이산의 경험과 약자의 서러움을 공유하는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두 집단이 서로 대치할 수 밖에 없는 모순적 현실에 신음했다.     현재 진행되는 또 다른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역사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위치는 항상 뒤바뀔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늘 긴장을 놓을 수 없다. 내가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아니 내가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서 교수는 식민주의적, 국가주의적 폭력을 끊을 수 있는 힘이 디아스포라적 삶을 통해 가능하길 염원했다. ‘의식적으로 피차별자의 위치에 서는 것’이 그것이다. 그는 실제 피차별자로 살았지만 의식적으로 한 번 더 그렇게 살아가려고 했다. 자신이 경험한 차별과 배척의 기억을 다른 소수자, 약자, 디아스포라들을 인식할 수 있는 보편적 시선으로, 심오한 질문으로 승화시켰다. 나는 누구인가, 당신은 누구인가. 우리는 왜 소외된 이들에게 관심 가져야 하는가. 왜 세상을 바꾸어야 하는가.   그는 생전 마지막 강연에서 자신의 정신적 스승, 레비가 인간해방의 보편적 가치에 관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수용소에서 ‘값비싼 대가를 치렀던’ 인간이었음을 대중에게 상기시킨다. 서 교수 역시 그랬다. 그는 한반도 근대사의 풍파를 정면으로 맞으며 ‘값비싼 대가’를 치른, 그래서 우리에게 ‘디아스포라적 삶’이라는 유산을 남긴 사람이다. 죽음에 가까워진 이들이 외쳤던 인간에 대한, 삶에 대한, 희망에 대한 담론은 그래서 무게감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필자는 생전에 꼭 뵙고 싶었던 서 교수의 묘, ‘디아스포라 묘’를 꼭 찾아볼 것이다.  전후석 / 다큐멘터리 감독디아스포라 시선 거주 재일조선인 유대인 팔레스타인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2024-02-12

[기자의 눈] 시련에서 얻어야 할 것

“계속 울래? 원한다면 그래도 돼. 하지만 웃으면서 다시 뛰어놀 수도 있어. 너의 선택이야.” 우연히 한 아이를 달래는 선생님의 얘기를 들었다. 친구와 놀다가 넘어져 씩씩대는 아이에게 선생님은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라는 평범한 위로가 아닌 선택지를 줬다. 선생님의 얘기를 들은 아이는 아직 분이 가라앉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동시에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곤 뒤로 돌아 재밌게 노는 아이들을 한번 쳐다보더니 다시 가서 놀겠다고 얘기했다. 선생님은 미소를 띠며 “그래? 다시 돌아갈 때는 눈물 그치고 웃으면서 가야 해. 그럴 수 있겠어?”라고  물었고 아이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뛰어갔다.     선생님과 아이의 대화에서 ‘선택’이란 흔한 단어가 ‘감정’과 함께 놓이니 낯설게 느껴졌다. 나름 시련일 저 상황에서 아이는 ‘슬픔’ 대신 ‘행복’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가온 시련에 어떤 반응을 하는가. 거기서 어떤 선택을 하는가.     마음에 짐이 되는 무거운 상황들이 잇따를 때 자연스레 낙담과 절망이 뒤따라오곤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누군가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지도, 부추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많은 경우 저항 없이 그 감정들을 받아들인다. 이따금 머릿속에선 갖가지 상상의 가지들이 세차게 뻗어 나가고 감정은 배로 증폭된다. 이 과정에서 감정의 주체는 자기 자신임을 쉽게 잊어버리곤 한다.     상황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거기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만 있을 뿐이다. 미국의 저명한 설교가인 찰스 스윈돌 목사는 “우리 인생은 사건 10%와 그 사건을 대하는 우리의 반응 90%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사건 그 자체보다 삶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해석에 따라 인생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지만,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에 주어진다.     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체험을 통해 얻은 교훈을 담은 에세이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이런 인간의 선택과 자유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굶주리고 매 맞으며 고된 노역을 이어가는 곳, 병이 들거나 일을 할 수 없으면 가차 없이 개스실로 보내지며 말 그대로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하루하루를 버텼던 저자 플랭클은 책에서 “나는 살아있는 인간 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의 의지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이어 플랭클은 “인간이 시련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고 덧붙였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가 삶의 시련을 대하는 태도가 남들과 다른 것이라고 한다. 리더십 분야의 권위자인 존 맥스웰은 성공한 사람들은 실패와 좌절의 과정에서 절망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나는 무엇을 배웠는가’라고 스스로 되묻는다며 이것이 실패한 사람들과의 차이라고 설명했다.     누구에게나 시련은 주어진다. 하지만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느냐는 각자의 선택이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 ‘프랭크 vs 갓’에 나오는 한 성직자의 말은 시련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묵직한 의미를 던진다. “강한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니 신은 나를 더 강하게 해줄 시련을 주셨습니다. 지혜를 달라고 요청하니 풀어야 하는 문제들을 주셨습니다.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니 신은 극복해야 하는 위험한 일들을 겪게 하셨습니다. 사랑을 달라고 기도하니 내가 도울 수 있는 어려운 사람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제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다가올 시련에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낙담과 절망인가 아니면 배움과 도전인가.  장수아 / 사회부기자의 눈 시련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낙담과 절망 로맨틱 코미디

2023-01-08

[이 아침에] 사는 것이 시들해지면

아무 것도 하기 싫은 날은 아무 것도 안 하면 된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는 날은 그냥 안 만나면 된다. 삶의 울타리가 무너지고 영혼의 우물가에 핀 꽃들이 시들어가는, 어제까지 푸르고 드높았던 하늘에서 빗물이 눈물처럼 흘러내리고  비오는 날 수제비도 칼국수도 안 먹고 싶어지는 날. 구멍 뚫린 가슴으로 바람이 드나들고 땅바닥에 주저앉으면 영영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는, 탈진한 육신과 소진된 영혼으로 한 발자욱도 나아갈 수 없이 무기력한 날은 애써 삶의 의미를 찾으려 용 쓸 필요없다. 이 나이에 새삼 허무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거울 속 내 모습이 너무 늙었다.     ‘로고테라피’는 삶의 가치를 깨닫고 목표를 설정하도록 하는 것에 목적을 둔 실존적 심리치료 기법이다. 로고테라피(Logotherapy)의 로고스(Logos)는 ‘의미’를 뜻하는 그리스어다. 존재의 의미를 찾아 나가는 인간 의지에 초점을 맞춘 이론이다. 인간은 스스로 이상과 가치를 위해 살 수 있는 존재고 그것을 위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존재의 의미를 갈구하는 인간의 의지는 때론 좌절 당하기도 하지만 그 의미를 추구하는 노력과 긴장은 정신적으로 필요하다. 성취한 것과 성취해야 할 것, 현재의 나와 앞으로 되어야 할 내 모습 사이의 간극이 긴장이다. 정신은 다듬을수록 예리해지고 긴장을 극복하지 못하면 무기력해지고 나약해 진다.       ‘로고테라피’의 창시자 빅터 플랭클 박사는 3년간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감금돼 아내와 부모형제를 잃고 지위·재산·연구자료를 박탈 당하며 죽을 고비를 넘긴다. 수용소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장 중요했던 것은 음식·날씨·잠자리가 아니라 ‘미래애 대한 믿음과 희망’이라고 고백한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으면 정신력도 잃게 되고 자포자기하게 된다. 프랭크 박사는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고 설명한다.     ‘의미’는 말이나 글의 행위나 현상의 뜻, 사물이나 현상의 가치를 말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고 했다. 아름다운 무지개를 보려면 비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미국 와서 얼마간 우울증과 무기력에 시달렸다. 몸이 땅 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두려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절망감이 두 달에 한 번, 열흘 정도 계속됐다. 내가 만든 감옥에 나를 가두고 덫에 걸린 짐승처럼 허우적거렸다. 남은 속여도 내 자신을 속이기는 힘들다. 장교부인회 국제부인회 활동을 하며 짧은 영어 실력으로 동서문화에 관한 연사로 다녔다. 화려한 일상이였지만 내가 꿈꾸던 삶은 아니였다. 다시 공부를 시작해 그림 그리고 글을 쓰면서 오랜시간 나를 숨막히게 했던 무기력에서 벗어났다. 나를 목졸리게 했던 어둠의 시간은 진정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는 몸부림이였다.     지금 사는 나의 모습과 진실로 추구하고 싶은 내 모습의 간극을 줄이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간극(間隙)은 시간 사이의 틈이다. 이룬 것과 이루고 싶은 것의 틈을 좁히면 생의 의미가 뚜렷하게 보인다.  사는 것이 허공에 밧줄을 매다는 것이라도,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공포로 어둠의 시간들이 덮친다해도, 붉게 물든 단풍이 지고나면 작지만 세상에서 가장 빛나고 소중한 내 몫의 크리스마스트리에 작은 방울 달 작정을 한다.   이기희 / Q7 Fine Art 대표·작가이 아침에 두려움 아무것 장교부인회 국제부인회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2022-10-23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사는 것이 시들해지면

아무 것도 하기 싫은 날은 아무 것도 안 하면 된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는 날은 그냥 안 만나면 된다. 삶의 울타리가 무너지고 영혼의 우물가에 핀 꽃들이 시들어가는, 어제까지 푸르고 드높았던 하늘에서 빗물이 눈물처럼 흘러내리고 비 오는 날 수제비도 칼국수도 안 먹고 싶어지는 날. 구멍 뚫린 가슴으로 바람이 드나들고 땅바닥에 주저앉으면 영영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는, 탈진한 육신과 소진된 영혼으로 한 발자욱도 나아갈 수 없이 무기력한 날은 애써 삶의 의미를 찿으려 용 쓸 필요 없다. 이 나이에 새삼 허무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거울 속 내 모습이 너무 늙었다.     ‘로고테라피’는 삶의 가치를 깨닫고 목표를 설정하도록 하는 것에 목적을 둔 실존적 심리치료 기법이다. 로고테라피(Logotherapy)의 로고스(Logos)는 ‘의미’를 뜻하는 그리스어다. 존재의 의미를 찾아 나가는 인간 의지에 초점을 맞춘 이론이다. 인간은 스스로 이상과 가치를 위해 살 수 있는 존재고 그것을 위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존재의 의미를 갈구하는 인간의 의지는 때론 좌절 당하기도 하지만 그 의미를 추구하는 노력과 긴장은 정신적으로 필요하다. 성취한 것과 성취해야 할 것, 현재의 나와 앞으로 되어야 할 내 모습 사이의 간극이 긴장이다. 정신은 다듬을수록 예리해지고 긴장을 극복하지 못하면 무기력해지고 나약해 진다.       ‘로고테라피’의 창시자 빅터 플랭클 박사는 3년간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감금돼 아내와 부모형제를 잃고 지위-재산-연구자료를 박탈 당하며 죽을 고비를 넘긴다. 수용소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장 중요했던 것은 음식-날씨-잠자리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라고 고백한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으면 정신력도 잃게 되고 자포자기하게 된다. 프랭크 박사는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고 설명한다.   ‘의미’는 말이나 글의 행위나 현상의 뜻, 사물이나 현상의 가치를 말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고 했다. 아름다운 무지개를 보려면 비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미국 와서 얼마간 우울증과 무기력에 시달렸다. 몸이 땅 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두려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절망감이 두 달에 한 번, 열흘 정도 계속됐다.   내가 만든 감옥에 나를 가두고 덫에 걸린 짐승처럼 허우적거렸다. 남은 속여도 내 자신을 속이기는 힘들다. 장교부인회 국제부인회 활동을 하며 짧은 영어 실력으로 동서문화에 관한 연사로 다녔다. 화려한 일상이였지만 내가 꿈꾸던 삶은 아니였다. 다시 공부를 시작해 그림 그리고 글을 쓰면서 오랜 시간 나를 숨막히게 했던 무기력에서 벗어났다. 나를 목졸리게 했던 어둠의 시간은 진정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찿는 몸부림이였다.   지금 사는 나의 모습과 진실로 추구하고 싶은 내 모습의 간극을 줄이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간극(間隙)은 시간 사이의 틈이다. 이룬 것과 이루고 싶은 것의 틈을 좁히면 생의 의미가 뚜렷하게 보인다.   사는 것이 허공에 밧줄을 매다는 것이라도,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공포로 어둠의 시간들이 덮친다 해도, 붉게 물든 단풍이 지고 나면 작지만 세상에서 가장 빛나고 소중한 내 몫의 크리스마스트리에 작은 방울 달 작정을 한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장교부인회 국제부인회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프랭크 박사

2022-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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